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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크랩] 문인화 즉 사군자의 [ 정체성 ] 강사 이병진
    문인화 2008. 4. 22. 16:18

    예술가의 정체성과 탐색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행위하는 가운데 이어진다. 그리고 그 행위는 자의와 타의, 역사에 의해 늘 정체성 여부가 검증된다. 행위의 모든 것이 참된 형체이었으면 하는 인간의 모범적 바램은 늘 검증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집요하게 學을 시행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끊임없이 철학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명가들의 궤적을 더듬는다.

    그리고 그 학의 결과에 의해서 정체성을 확립한다. 아마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특성이리라.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인간이 자유를 희구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물로 인해 세포가 형성되고 성숙한 인간이 자연을 희구하는 것, 그것이 곧 근원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예술 행위는 마치 종교처럼 인간의 근원적 정체성 찾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분명 예술가의 표현 행위는 자유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로운 속에 지녀야 할 바른 형체는 거시적인 예술 정체성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전통적 정체성을 통찰하여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현의 자유를 누리려 한다면 곧 그것은 예술가적 사명감 결여이며 진정한 예술가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가 정체성을 올곧게 지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서도 세월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하나로 집약될 수가 없으니 이 시대 문인화의 정체성 또한 '무엇이다'로 규정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야 된다'로 결론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행위의 결과가 있고 난 훨씬 후에는 진정한 정체성 여부가 가려진다. 따라서 끊임없이 학을 시행하며 검증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병진의 / 석란>

    문인화의 개념

    그간 문인화를 자칫 비전문가들이 여기餘技로 즐기는 것이거나 동양화(한국화)나 서예를 보완하는 주변 장르로 인식하는 편견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편견의 원인이 되는 비전문적, 여기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문인화의 특질이라 하겠다. 비전문적, 여기적, 또는 비정형성, 사의寫意적 관념성 등의 특성에서 인공이되 자연적인 미, 토속적이면서도 격조가 있는 미, 힘차면서도 은근미가 생겨나서 사실성 이외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문인화는 문인지화文人之畵, 즉 "문인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문인적 특성이 드러나는 그림"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여기에서 주가 되는 문인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학인을 지칭하는 협의를 포함하지만 전통적 문인의 진정한 의미는 "학문과 덕행과 문장이 뛰어난 사람" "학문과 덕행을 닦는 사람", 그리하여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전통적 진리에 판단의 중점을 두는 사람", 또한 "성인의 진리를 인식하고 이를 따르려 하는 사람"을 모두 지칭한다고 하겠다.

    문인화는 역사 속에서 이들 문인이 지녔던 인문주의 발현의 한 산물로서 이루어졌고 지금까지 전래되어 왔다고 하겠다. 인간의 정체성을 위해 사물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사의적 형체를 띠고 이루어진 작품들이 전통적 문인화의 실체이며 오늘날 문인화의 기저이다.문제는 오늘날에 있을 수 있다. 직업적 문인화가와 문인화 학습으로 여가를 선용하는 많은 작가들이 과연 문인인가? 이들은 역사 속에서 검증된 문인적 특질을 얼마나 지니고 있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치기 때문이다.

    문인화가라면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거적 개념으로 현재의 문인화가를 문인이다 아니다로 판단할 수는 없다. 인문학을 하면서도 인문주의 주체성 결핍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연히 문인화는 전통을 이어 존재하고 있고 그 형식을 이어가고 있으니 문인화가는 곧 문인을 지향해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이 시대의 문인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늘 정체성을 검증한다. 그것은 곧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이 변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체성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이라면 그것 또한 정체성이 아니다. 이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변역, 불역과 같은 유기적 관련성이다. 곧 정체성이란 변해야 할 곳에서는 변하고 변하지 말아야 할 곳에서는 철저히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인화가가 문인이어야 함은 불변의 진리이되 과거적 문인이 아닌 현대적 문인주의의 실천자이어야 할 것이다.

    곧 오늘날의 문인 개념은 인문학자이거나, 성인聖人을 근거로 자기를 수양하여 인간의 본성을 닦으면서 그것을 실천해 내는 사람, 또는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등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어떤 사람을 누군가가 문인이라고 지칭한다면 쉽게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구멍가게를 통해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소득을 올리는 반면 물질만을 축적하려 하는 욕심이 없이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의 연마를 통해 본성을 유지하며 선을 행하는 데 작은 시간이나마 즐겨 할애한다면 그를 '현대의 문인'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사물 인식의 내적 의상을 전통적 문인화 형식을 빌거나 또는 고전을 토대로 한 새로운 형식으로 생산해 냈다면 그것이 곧 이 시대 문인이 그린 그림, 즉 '현대의 문인화'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진의/ 묵죽>

    이 시대 문인화의 정체성을 위하여

    문인화의 정체성은 두말할 나위 없이 문인화가에게 문인화가다운 정체성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난다는 것이 위의 결론이었다. 따라서 마땅히 문인화가가 정체성을 지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정체성을 위한 불변의 원칙 중 하나가 있다. 그것은 곧 "베껴라"이다(베껴라는 소장 철학자 강유원이 공부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제시한 것이다). 베끼라는 말이 표절을 하란 말이 아님은 다 알 것이다. 좋은 작품, 잘 된 작품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잘 베껴서 좋은 작품이 지닌 정체성을 알아내야 한다.

    '정체성이고 뭐고 내 그림 내가 그리면 그것이 곧 정체성이지 무슨 잔말이 많으냐'라고 한다거나 자신이 베낄 단계는 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읽기를 그만두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베끼기가 초보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하는 것이다. 베끼기는 곧 영양 섭취와 비교될 수 있다. 영양을 섭취함이 없이 소모만 한다면 곧 에너지가 고갈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베끼기를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베낄 대상의 선택이다. 이를 선택하는 것은 참고에 참고를 거듭해야 한다.

    누가 어떤 것에 대해 중요성을 역설한다고 해도 막연히 따르기보다는 자기 책임을 다 하는 주관적 선택이 정체성 확립에 빠르다. 대상이 선택되면 처음부터 성실하게 베껴야 한다. 베끼기 좋다거나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베껴서도 안 된다. 또 한 가지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만을 추종하는 것은 학문이나 예술의 자세가 아니다. 오로지 하나를 추종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일 뿐이다. 이번 [99 대한민국 문인화 특별대전]에서 아쉬운 점은 전통의 내면 베끼기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전통 정신은 적당히 제쳐두고 반면 당대 작가들의 기법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점이 많았다. 이런 결과는 화목의 다양화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화를 위한 다양화로만 비춰지고 있다.

    한국 사상과 문인화의 유기성 연구의 요구

    금번 대전을 통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부 유파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기존 공모전에 비해 출품자나 작품의 숫자가 대폭 증가한 것이다. 출품자와 출품작 숫자를 늘리기 위해 무리를 범한 몇몇 부정적 요소가 드러나지만 이는 문인화계를 고무하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문인화 수학 인구가 이처럼 많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간단히 생각해 볼 때 문인화를 매개로 삼아 자기를 수양하고 또 자기만의 특질을 발현 고양시키려고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점이다. 또 문인화가 현대인에게도 자기를 발현해 내는 매체로서 적합했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문인화의 어떤 점이 그러한 특성을 지녔는가? 시각적으로 동양화보다 간결해서 쉬워 보인다거나 서예보다 다채로와서 흥미를 끄는 등의 표피적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문인화의 특성이 한국인의 정서 발현에 매우 적절한 점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지녀 온 인문주의적 성향과 문인화의 기저가 되는 문인주의 사상의 유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규명해 내야 하는 것이 문인화계의 과제 중 하나라고 하겠다. 이는 많아진 문인화 인구를 위하는 것이며 이 시대 문인 화가와 문인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병진/ 만향한취>

    마치며

    작금 한국의 문인화가들은 문인적 시각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표현하려는 것보다는 회화적이려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의 동양화(한국화)과 중견 중진 교수들 사이에서는 탈장르 현상이 가져온 필묵의 기초 인식 부실과 정신의 공동 현상을 줄이기 위해 문인화 교육과 서예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회화에서는 문인화와 서예의 특성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반면 문인화계는 이들에서 분리하기 위한 수순으로서 <협회의 창립>과 [99 대한민국 문인화 특별대전]을 치렀다. 서두에서 말한 본질적 우려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문인화계의 이런 현상은 이 시대 문인화의 정체성 찾기의 일환일 수 있다. 나는 이에 호응하는 마음으로 이 시대 문인화의 정체성을 탐색해 보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본고는 공모전에 드러난 외적 현상을 논하기보다는 현상을 통해서 이면을 보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었음을 밝히며 졸고를 마친다.

    평생 사군자 동아리카페에서 옮긴 글

    출처 : ★ 명상의집 화가드러머 ★
    글쓴이 : 클래식친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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