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설화(三姓說話)와 시조(始祖) 양을나(良乙那) |
국사(國史)상에 나타난 개국시조설화(開國始祖說話)의 형태를 보면 환웅신화(桓雄神話)와 북부여 해모수왕 전설(北扶餘 解慕漱王 傳說)은 천신족설(天神族說)에 속하고, 제주도(濟州道) 삼성설화(三姓說話)와 서술성모설화(西述聖母說話)는 지신족설(地神族說)에 속하며, 단군(檀君)과 대가야시조전설(大伽倻始祖傳說)은 천지양신족설(天地兩神族說)에 속하고, 그 밖에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석탈해전설(昔脫解傳說)은 외래족설(外來族說)에 해당하며, 주몽(朱蒙), 김와(金蛙), 혁거세(赫居世), 알지(閼智) 전설 등은 난생전설(卵生傳說)에 해당된다.
우리 시조강생사적(始祖降生史蹟)과 개국신화(開國神話)를 보면 지금으로부터 4,300여년전 멀리 단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단군(檀君)은 4,309년전 평안북도 영변군소재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박달나무 아래에서 탄생하시어 평양에 개국전도(開國奠都)하시었고, 우리 시조이신 양을나(良乙那)는 단군과 때를 같이 하여 제주도 한라산 기슭의 모흥혈(毛興穴)에서 탄강(誕降)하시어 탁라국( 羅國)을 창건하시었다.
당시의 동양정세(東洋情勢)를 보면 중국 대륙에는 한족(漢族)의 선조 도당씨(陶唐氏) 요제(堯帝)가 건국한지 얼마 안되고 한반도에는 단군이 개국한 때이며, 시조 양을나(良乙那)께서는 제주도에서 탁라국( 羅國)을 개국하시어 삼국이 정치(鼎峙)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 양씨(梁氏)는 신라 6성(六姓) 이전에 이 땅에 자리잡은 왕손(王孫)이며 가장 역사를 길게 갖은 토족(土族)이다. 또한 양씨(梁氏)는 모두가 탐라국(耽羅國) 삼성혈(三姓穴) 설화(說話)의 양을나(良乙那)를 단일 시조(始祖)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이다.
우리 시조(始祖) 을라왕(乙那王)의 탄강(誕降)에 관하여서는 고대동서각국(古代東西各國)의 시조들이 그러하듯이 신비스러운 역사적 기록을 남겨 두었는데, 중국에서는 천지개벽(天地開闢)으로 시조가 태어났다 하고 단군 임금은 단목(檀木)하에서 태어났으며 신라의 혁거세와 가락국의 수로왕은 알에서 나왔다 하나 우리 시조는 지금도 그 유적이 뚜렷한 삼성혈(三姓穴)이 있으니 다른 시조와는 특별하다.
시조 양을나왕(良乙那王)은 한라산 북녘 기슭에 있는 모흥혈(母興穴)에서 땅으로 부터 솟아 나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시조는 지신족(地神族)에 속한다고 한다. 이 때 모흥혈(毛興穴) 세 구멍에서 차례로 각각 한 분씩 나오셨다고 하는데 그 맏이가 우리 양씨(梁氏)의 시조 양을나(良乙那)이시고 둘째가 고씨시조(高氏始祖) 고을나(高乙那)이시며 세째가 부씨시조(夫氏始祖) 부을나(夫乙那)이시다. 그러므로 그 뒤로 부터 이 곳을 삼성혈(三姓穴)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 모흥혈(毛興穴)이라는 모(毛)자도 셋 건너 긋고 새을(乙)자를 한 글자로서 삼을나(三乙那)라는 뜻으로 모(毛)자가 쓰여졌다고 하며 삼성(三姓)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모흥혈(毛興穴)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탐라지(耽羅誌)와 탐라기년(耽羅紀年)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고려사(高麗史) 卷57志 卷11地理志297面 ○ 동국통감(동국통감) 卷之231面 ○ 해동역사(海東繹史) 卷第62面(朝鮮光文會刊)
이상 열거한 사책(史策)과 기지(記誌)에 수록된 자료에 의하여 시조(始祖) 양을나(良乙那)의 탄 강사적(誕降史蹟)과 개국신화(開國神話)를 알기 쉽게 풀이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삼성혈(三姓穴)................... 소재지: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 131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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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제주도에 인간과 만물이 없었다. 이 때에 세 신인(神人)이 처음 한라산 북녘 광양(廣壤)땅 모흥혈(毛興穴)에서 나셨다. 첫째는 양을라(良乙那)요 다음은 고을나(高乙那)요 셋째는 부을나(夫乙那)이시다. 세 분이 황야에서 짐승 가죽으로 옷을 해입고 육식을 하면서 생활하여 왔는데 하루는 지금의 남제주 연서포 쪽을 바라보니까 나무로 만든 함(函)에 붉은 흙으로 뚜껑을 봉한 이상한 물건이 바다에서 떠 와서 동쪽 해안에 닿으므로 달려가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 옥(玉)으로 만든 함이 있었고 보라색 옷에 분홍띠를 띈 사자(使者)가 따라와 같이 석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서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 송아지 그리고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사자(使者)는 말하기를 "저는 벽랑국(璧浪國: 현 日本, 완도(莞島)라는 說도 있음)에서 온 사자(使者)입니다. 우리나라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서해(西海)의 한 섬에 신자(神子) 세 분이 탄강(誕降)하시어 앞으로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나 배필이 없으시다 하시고 저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라 하여 왔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으셔서 대업(大業)을 이루소서" 하고는 말이 끝나자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분께서 나이 차례대로 그 왕녀들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기름진 땅을 찾아 활쏘기로 거처할 땅을 점쳤는데 양을나(良乙那)의 지역을 제일도(第一徒: 史作都)라 하고 고을나(高乙那)의 지역을 제이도(第二徒)라 하고 부을나(夫乙那)의 지역을 제삼도(第三徒)라 하였다. 그후 각각 오곡(五穀)의 씨앗를 뿌리고 말과 소를 기르게 되니 백성이 날로 늘고 부유해져 갔다.
그러면 구보(舊譜)에 수록된 글월과 고려사고기(高麗史古記)지리지(地理誌) 등 사초(史草)에 실려있는 원문 몇 가지를 첨부한다.
○ 시조강생사적(始祖降生史籍) ○ 고려사고기(高史古記)
2. 良(양)을 梁(양)으로 고친 역사적 배경
良乙那(양을나)를 유일시조로 하는 梁(양)씨는 관향(貫鄕)이 70여본(本)으로 되어 있으나 이 모두가 제주, 남원, 충주 삼관(三貫)의 지파(支派)이며 제주에서 분적(分籍)되어 간 것이다.
梁(양)씨는 크게 나누어 정통을 이어 온 제주(濟州)와 육지의 梁(양)씨(陸梁)로 대별된다.
오늘날 전국에 걸쳐 약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梁(양)씨는 성별 순위 16위로서, 姜(강), 趙(조), 尹(윤), 張(장), 林(임), 韓(한)씨 등과 더불어 저성(著姓)에 속한다.
모든 梁氏는 탐라(耽羅)의 신인(神人) 양을나(良乙那)를 유일조(唯一祖)로 하는 동계혈족(同系血族)이며 본래는 良姓(양성)을 쓰다가 신라 때 梁으로 개성(改姓),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말기에 이르기까지 良과 梁 두가지로 쓰여 왔으나 고향에 남아 있는 제량(濟梁)은 오래도록 良으로 칭한데 반해 일찍 육지로 이주한 陸梁(육양)이 먼저 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신인(神人) 良乙那(양을나)는 고조선의 단군과 같은 무렵에 탐라국(耽羅國)을 개국(開國)하여 왕으로 군림(君臨)했으며 그 자손이 대대로 왕위(君主)를 계승하여 서기938년이 되는 고려 태조 21년에 이르기까지 탐라(耽羅)를 통치해 왔다.
良씨가 처음으로 梁씨로 바뀌기는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때인 서기 374년의 일이었다. 내물왕(356~402년) 46년간을 재위(在位)했는데 이 기간 동안 고구려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지고(372년) 광개토왕이 즉위(391년)하는 등 국제적인 변화가 심했다.
당시 탐라(耽羅)의 梁宕(양탕)이 신라에 들어가 광순사(廣巡使)가 되었고 뒤에 많은 작록(爵祿)을 받았는데 이때 개성(改姓), 梁씨로 고쳤다고 한다.(출처:耽羅記年) 그러니까 梁宕(양탕)에 의해 梁姓(양성)이 처음 쓰여졌던 것이지만 梁氏들의 대신라교섭은 그보다 훨씬 앞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三國史記(삼국사기), 新羅本紀[二](신라본기), 沾解尼師今朝(첨해이사금조)에는 '良夫(양부)란 사람으로써 伊飡(이손:二品벼슬)을 삼았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석학(碩學) 梁大潤(양대윤)교수(성균관대, 동양철학)는 앞의 梁夫(양부)란 이가 탐라국에서 왔다는 기록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그 선대(先代)에 이미 신라에 왕래했었음이 분명하다고 풀이한다.
또 良夫(양부)는 뒤에 다시 일품(一品)직인 舒佛邯(서불한: 伊伐飡 이벌손)에 올랐는데 그 직위는 진골(眞骨:부모의 한쪽이 왕가계통)이라야만 오를 수 있었음에 비추어 성골(聖骨:왕족)인 朴(박), 昔(석), 金(김)씨 측과 혼인관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 梁교수의 말이다.(출처 韓國姓氏大觀)
良夫(양부) 다음으로 사기(史記)에 오른 이는 신라 미추왕(味鄒王) 20년에서 동 22년(서기281년)까지 槐谷城(괴곡성)에서 일어난 백제군과의 싸움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良質(양질)이다.
이같은 역사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梁氏의 육지 진출은 지금으로 부터 16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 사실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제12대 沾解王(첨해왕 서기247~261년) 및 제13대 味鄒王(미추왕 서기261~284년) 시대는 신라가 아직 부족국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고 백제의 東城王(동성왕)이 서시498년에 탐라(耽羅)가 조공(朝貢)하지 않는다 하여 정벌하려 하자 탐라가 그 정(情)을 미리 알고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는 역사의 기록은 그 시기가 240여년이 앞서 있음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열린 양씨(良氏)의 육지 진출은 탐라의 해외교섭(海外交涉)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을 뿐아니라 신라의 국기(國基)를 다지는데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또한 탐라인의 굳굳한 기상을 내외에 과시한 표상이기도 했다.
한편 제주양씨(濟州梁氏)의 일파(一派)가 처음 남원(南原)으로 관적(貫籍)하게 된 것은 신라통일기에 梁友諒(양우량: 梁宕(양탕)의 8대손이라 함)이 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 부백(南原府伯)에 봉해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良이 梁姓(양성)으로 고쳐진 후 모든 양씨는 올해로 1629년의 긴 역사를 면면히 어어온 것이다. 2003년 11월 일
제주시 이도1동 1313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134호의 삼성혈(三姓穴)은 제주도의 개국신화가 깃든 사적지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현존 유적이며, 7,097평의 울창한 숲속에 혈단(穴壇)을 중심으로 탐라시조 삼을라(三乙那)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과 분향소, 제향을 받드는 전사청, 서원이었던 숭보당이 들어서 있다.
개국신화에 의하면 삼신인[三神人: 양을나(良乙那),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이 이곳에서 동시에 태어나 수렵생활을 하다가 우마(牛馬)와 오곡(五穀)의 종자를 가지고 온 벽랑국 3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되었으며 탐라왕국으로 발전하였다고 전한다.
삼성혈은 모흥혈(毛興穴)이라고도 하며 이 세개의 지혈(地穴)은 품(品)자형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둘레가 6척,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전해지며 나머지 두개의 혈은 각각 3척인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흔적만 남아 있다.
삼성혈의 주위는 돌담 및 수백년된 고목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성역안에는 8백년 된 곰솔나무와 1백여년 안팎의 소나무,녹나무,조팝나무,머귀나무,조록나무 등 무려 70여종의 진귀한 나무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또 모든 나뭇가지들이 혈(穴)을 향하여 경배하듯이 신비한 자태를 취하고 있어 탐라개국의 경건함을 더해 준다. 또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빗물이 고이지 않고 눈이 내려도 혈내(穴內)에는 눈이 쌓이는 일이 없는 성혈(聖穴)로서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삼성혈의 조성(造成)은 조선중종 21년(1526) 제주목사 이수동(李壽童)이 처음 혈단(穴壇) 둘레에 돌담을 쌓고 홍살문(紅門)과 혈비(穴碑)를 세워 춘추봉제(春秋奉祭)를 모시게 하고 매년 동지달(11월) 上丁日(상정일)에 도민들로 하여금 정성어린 제사를 모시도록 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으며, 특히 유교국시(儒敎國是)의 조선조에서는 조정의 각별한 배려와 역대 목사들의 존숭치적(尊崇治績)으로 더욱 신성시되었다. 1785년에는 정조대왕이 '三姓祠'(삼성사)라는 편액(扁額)을 친히 하사하시어서 왕(王)에 대한 예우로써 국제(國祭)로 봉향하도록 하교하였다.
제향(祭享)은 매년 4월10일에 춘기대제를 10월10일에는 추기대제를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봉향(奉享)하고 12월10일에는 건시대제(乾始大祭)라하여 혈단에서 드리고 있는데 모든 제관(祭官)들은 왕에 대한 예우로써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하여 3일전에 입재하여 목욕재계하고 제향에 임한다. 그리고 이 건시대제는 조선시대에는 국제(國祭)로 모시다가 현재는 제주도민제로 봉행하고 있으며 초헌관(初獻官)은 제주도지사, 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은 덕망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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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사 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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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각(慕聖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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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三聖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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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보당과 전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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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報堂) (典祀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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